[동창회 70년사 속으로] 총동창회의 새 전기, 동창회보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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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6-04-23 09:03 조회 35회 댓글 0건본문
▲『영대동창회보』 창간호(1982)
동창회보 창간 이후 동문 소통·조직 결속의 중심 매체로 자리매김
안정적 재정 기반과 체계적 운영으로 지령 100호까지… 동문사회 결속의 기록
본 내용은 지난해 발간된 ‘총동창회 70년사’에 수록된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동문의 구심점 역할과 전기를 마련한 동창회보
1982년 8월 5일 『영대동창회보(嶺大同窓會報)』(영문 ‘The Yeungnam University Alumni News)라는 제호로 영남대학교 동창회보를 창간하였다. 동창회보는 총동창회의 오랜 숙원사업으로 더는 발간을 미룰 수 없다는 것에 중지를 모아 당해 3월 정기총회에서 발간을 결정하였다.
회장단은 동창회보 발간을 위한 기금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광고 수입을 통해 자급자족하기로 결의하고, 대구일보·영남일보 출신의 동문 안유호(60.법학)를 회보발간추진회의 위원장으로 위촉하여 동창회보 발간 준비를 착수하였다. 6월에는 회보발간추진위원회를 회보편집위원회로 개편하고, 편집위원을 위촉하였다. 창간호의 발행인은 총동창회장 김용환, 편집인 겸 주간은 부회장 안유호이며, 상임편집위원은 전 영남일보 사회부 기자 출신의 조세현 동문이 맡았다. 또한 회보 발간을 전담할 편집위원 12명을 위촉하였으며, 편집위원장은 부회장 안유호가 겸임하였다.
동창회보는 편집위원회 주관하에 월간으로 2,000부가량을 인쇄한 후 회원들에게 배포
하기로 하였다. 총동창회장 김용환은 창간사를 통해 동창회보가 서울과 지방 각지에 흩어져 있는 3만 7,000여 명 동문들의 구심점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각계 각처의 축사도 이어졌다. 축사를 남긴 영남학원 이사장 류준은 동창회보 창간을 축하하고, 여러 동창의 희생과 봉사에 대한 감사의 말을 남겼으며, 영남대학교 총장 조경희는 동창회보가 동문들이 갈망하던 대화의 광장이 되고, 나아가 모교와 더욱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 매개체가 되기를 기대하는 축사를 남겼다. 영남대학교 미대의 정치환 교수는 ‘창간 축 화(創刊祝畵)’를 그렸으며, 문과대학 김복기(51.철학) 학장은 ‘창간 축문(創刊祝文)’을 썼다.
▣동창회 저변 확대와 일체감 도모
『영대동창회보』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컬러 표지에 세로쓰기 형식이며, 12면으로 구성되었다. 1면의 제목 ‘영대동창회(嶺大同窓会) 새장(章)을 연다’의 아래에는 당시 총동창회의 숙원 사업으로 진행 중이던 신축 총동창회관의 투시도를 게재하였다. 아울러 총동창회관 설계자인 대아건축설계연구소 대표 김인호 동문(55.건축)의 설명을 함께 수록해 놓았다.
또한 ‘사고(社告)’를 통해 동문들에게 수상(隨想), 수필, 길흉사, 동정, 건의 사항, 화젯거리 및 인물·관련 사진의 투고를 호소하며, 꾸준한 동창회보 발간을 위한 협조를 당부하였다. 동창회보에는 동창회와 모교 소식 이외에도 주요 동문들의 동정을 담은 「동문동정」, 주요 지부의 소식을 담은 「지부 순례」, 화제가 되고 있는 동문을 면밀하게 인터뷰한 「동문탐방」, 직장별·기수별 동문 모임을 소개하는 「우리는 영대인」, 각계 각처 동문 인사들이 동창회와 모교에 발언하는 「영대인 광장」 외 동문의 투고로 구성되는 「수필」 등을 수록하였다.
2호부터는 흑백 타블로이드판으로 인쇄하였으며, 모두 8면으로 구성하였다. 또한 4,000부를 발행한 제10호를 제외하고는 매호 3,000부 가량을 인쇄 및 배포하였다.
창간 초기 총동창회는 동창회보가 동창회의 ‘새 전기’가 되기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문의 정확한 동정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동창회보를 통해 ‘동문 찾기 운동’을 실시하였다. 우선 사무국에서 정확한 동문의 주소를 접수하였고, 소재 파악이 되지 않거나, 숨은 동문을 찾아 나섰다. 이를 통해 동창회의 저변을 확대함과 동시에 일체감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위한 동창회보발간위원회 구성
동창회보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1983년 6월 편집위원회에서는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위하여 ‘동창회보발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초대 후원회장으로 변호사인 오세도(52.법학) 동문을 추대하였으며, 부회장은 이순목(58.상학) 동문 외 10명의 위원을 위촉하였다. 모두 12명으로 구성된 동창회보발간위원회는 9월 8일에 발족하였다. 동창회보발간위원회는 동창회보의 영속적 발간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후원회 위원 확보에 주력하였다. 후원회 위원의 자격은 매년 1회 광고 협찬을 기준으로 삼았다. 광고 협찬을 이어 나갈 후원회 위원이 많으면 광고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광고료는 전면이 30 만 원, 3단 통이 10만 원이었다.
동창회보발간위원회 발족과 더불어 동창회보의 체계적인 운영을 위하여 제19조로 구성된 「회보 발간에 관한 정관」을 제정하였다.
▣동창회 활성화의 기폭제가 된 동창회보
동창회보 간행이 안정을 찾아가는 가운데 1983년 10월 28일 자로 『영대동창회보』가 언론기본법 「제20조 제1항 및 동법시행령 제5조 제2항의 규정」에 의거해 문화공보부에 정기간행물로 등록되었다. 동창회보의 등록번호는 ‘라-2803’이며, 등록 당시 발행인은 김용환 총동창회장, 편집인은 안유호 편집위원장이었다. 이로써 동창회보는 대한민국의 공식 언론으로서 사회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지령 50호, 100호로 이어지며 동문 간 가교 역할
동창회보는 창간호부터 23호까지 세로쓰기를 유지해 오다 1984년 8월 31일 간행된 24호부터 1면에 한정하여 가로쓰기 형식을 적용하였다. 1986년 5월 30일 간행된 43호부터는 「동문만평(同門漫評)」, 6월 30일 간행 44호부터는 4컷 만화 「야화로」를 함께 연재함으로써, 동문 독자의 흥미를 돋우었다. 당시 만화와 만평은 동창회보 편집위원이자 대구공업전문대학 교수였던 노병수(73.경영) 동문이 담당하였다. 9월 25일에는 동창회보가 매월 말일에 발간하는 3종 우편물 인가[(나)급 인가]를 획득함으로써, 부당 20원씩의 발송 경비를 절감하게 되었다.
1986년 12월 31일 『영대동창회보』 지령(紙齡) 50호를 12면으로 간행하였다. 창간호에 이어 두 번째로 12면으로 간행한 50호에는 앞으로 동창회보가 동창회 활동의 윤활유 구실을 담당하고 동창 간의 가교역할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여러 동문과 각계 각처 인사의 축하와 격려가 이어졌다. 1988년 7월 28일 ‘(대구)라-9’ 호로 등록번호를 변경하였다.
1991년 4월 5일에는 지령 100호를 16면으로 간행하였다. 지령 100호를 맞이해 심재완(52.국문) 동문이 ‘여이행인(與以行人) 용신물성(用信物誠)’ 여덟 글자로 쓴 친필 서예 작품을 기증하였고, 시인 이기철 동문은 기념 시 「눈이 되고 귀가 되라」를 헌정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