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그리운 ‘맥 선생님’!..천마인을 사랑했던 벽안(碧眼)의 참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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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3-07-05 00:59 조회 595회 댓글 0건본문

故 아서 J.맥타가트 교수 연보(年譜)
1915년 미국 인디아나주 출생
1944년 코넬大 졸업
1953년 주한 미 국무성 재무관
1976년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
1997년 퇴임 후 미국 귀국
1998년 ‘자랑스런 영대인賞’ 수상
2003년 7월 15일 미국에서 영면(永眠)

▲ '자랑스런 영대인상'을 수상한 맥타가트 교수(1998)

▲ 인문관 로비에 설치된 맥타가트박사 흉상

▲ 영남대학교에서 명예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제자들과함께 (1983)
편집자 주-아서 J. 맥타가트 교수는 70년대 중반부터 20여 년간 모교 영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미국인. 대한민국과 영남대에 아낌없는 헌신과 사랑을 베풀었던 이방인(異邦人) 스승이 세상을 떠난 지 꼭 20년이다. 생전의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영문학과 제자 김무한 동문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한 영혼을 추모하는 글을 동창회보에 기고(寄槁)해 왔다.
기적처럼 이뤄진 꿈같은 재회(再會)
20여 년 전 한국무역협회(KITA)의 워싱턴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한국 신문의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 인생에서 부모님 못지않게 큰 가르침을 주신 ‘맥 선생’의 이름이 거기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맥 선생’ 또는 ‘맥 할배’ 등의 애칭으로 불렸던 맥타가트(Arthur J. McTaggart)교수님의 ‘특별한 한국 사랑’을 소개한 기사(記事)에는 전화번호와 주소도 있었다.
전화로 확인한 위치는 워싱턴 D.C. 외곽 작은 동네의 요양원이었다. 선생님의 인자했던 얼굴을 떠올리며 자동차로 달려가는 1시간 남짓 동안 만감이 교차했고 지금의 건강 상태, 그리고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등등 모든 게 궁금했다.
추억은 방울방울, 그러나...
출입문에 낯익은 그림 몇장이 붙어있는 1인용 병실, 옷걸이의 낡은 ‘감색(紺色) 콤비’와 책상에 놓인 오래된 타자기는 학창시절 맥 선생님의 연구실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무심한 기억력은 내가 누군지, 왜 여기에 왔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한참이나 생각을 가다듬은 끝에 마침내 기억회로가 작동한 듯 “이놈!” 하는 귀에 익은 인사로 크게 반기시더니 30분의 짧은 면회가 끝없는 그 시절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영작문 수업과 엄격했던 학점, 영자신문 기자 생활, 장학금, 이중섭 화가 등 기억의 실타래가 풀린 것이다. 조만간 다시 오겠다는 다짐으로 잡은 손을 서로 한동안 놓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적 같은 면회 후 바쁜 몇 달을 보내고 다시 요양원에 전화를 걸었을 때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말았다. 2003년 7월 15일, 88세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책감에 선생님과의 여러 인연을 추억하며 이 글을 쓴다.
헌신적 가르침과 아낌없는 사랑
내가 맥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영문학과 2학년이던 1978년 초였다. 늘 진한 감색 콤비 상의와 검은색 바지에 ‘빵떡 모자’ 차림이었고 ‘독수리 타법’으로 50년 넘은 낡은 타자기를 두드리며 우리들의 ‘형편없는’ 영어 실력을 다듬어 주셨다. 학점이 짜기로 소문났지만 20명 정원의 영작문 수업은 늘 만원이었으며 학생들의 모든 과제물을 빠짐없이 꼼꼼하게 고쳐 주셨다.
당시 영자(英字) 신문(당시 Yeungnam Chronicle, 지금은 Yeungnam Observer) 기자로 활동했던 필자에게는 구세주 같은 분이었다. 나의 졸작은 빨간색 볼펜으로 다듬어져 어느새 얼룩덜룩 한 폭의 그림으로 바뀐다. 물론 다른 학생 기자들의 기사와 문장도 선생님은 하나하나 끝까지 교정(校正)을 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박봉을 털어 수시로 끼니까지 해결해 주셨는데 그때 맛본 중국집 오향장육과 난자완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를 포함해 그 ‘뻔뻔한 놈들’은 당연한 듯 맛있게 먹기만 했는데 돌이켜보면 참으로 염치가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 졸업 후 취업 인사로 대구 동성로의 한 식당으로 초대해 불고기를 대접해 드리자 “제자로부터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며 기뻐하시던 모습에서 마음의 빚을 조금은 갚았다는 위안을 얻기도 했다.
독신에 근검 절약, 3백여 명에 ‘우정 장학금’
항상 웃음 띤 얼굴에 약간의 장난기를 섞어 “이놈!”하고 부르면서 보여주신 삶의 지혜는 내 인생의 지침서와도 같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절약과 근면이 몸에 배었던 선생님은 낡은 양복에 꿰맨 양말, 헤진 구두를 신고 늘 걸어 다니거나 버스를 이용했으며 택시는 타는 법이 없었다. 학교에서 받은 월급 전부를 장학금으로 돌리고 사택으로 제공된 14평 AID아파트에서도 가난한 학생들과 함께 기거하는 등 숱한 일화와 미담으로 각종 매체에서 ‘살아있는 성자(聖者)’로 소개할 정도였다.
그가 만든 ‘우정 장학회’는 322명의 천마 인재들에게 총 2억 6천여만 원의 장학금으로 면학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제자들이 뜻을 모은 ‘맥타가트 추모사업회’는 자체 모금을 통해 장학사업을 이어가는 한편 모교 인문관에 흉상을 세우고 스승을 기리는 행사를 매년 열고 있다.
동서양을 넘나든 역사와 문화예술 안목
한국 사랑이 남달랐던 맥 선생님은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천재 화가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을 처음으로 해외에 소개한 사연은 유명하다. 종이마저 살 돈이 없던 가난한 화가가 담배곽 은박지에 못으로 그려낸 ‘은지화(銀紙畵)’는 이중섭만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1955년 1월, 주한 미 대사관의 문화담당관이자 대구 공보원장(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USIS)이던 선생님은 서울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에서 구입한 은지화 3점을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s: MoMA)에 기증하면서 극동의 무명화가를 국제무대에 알렸다. 예술성을 새롭게 평가받은 이중섭의 그림은 그 후 미술시장에서 상당한 고가로 거래되기 시작했고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에도 많은 애호가들이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몰려 들었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평생 수집한 고대 토기와 도자기 등 문화재 482점을 국립 대구박물관에 기증하는 등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도 남다른 식견과 애정을 보여주셨다. 또 세계문학, 서양 예술에도 매우 조예가 깊어 방학 때면 이탈리아 등지로 여행을 다녀와 기행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특히 한국과 이탈리아 두 나라는 반도(半島) 국가의 지리적 공통점에 가족관계를 중시하고 높은 애국심과 스포츠(축구), 미술, 음악을 좋아하는 취향도 비슷하다고 설명해 주시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45년 한국 생활, 영남대에 21년 헌신
1915년 8월 미국 인디애나주의 소도시 로건스포트(Logansport)에서 태어난 선생님은 코넬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스탠퍼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3년 미 대사관 재무관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뒤 1976년 영문학과 초빙교수로 영남대에 부임했고 1997년 12월 퇴임까지 21년 동안 수많은 천마인들을 글로벌 인재로 길러내셨다. 오늘과 같은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에 숨은 공로자라 아니할 수 없다.
필자가 한국무역협회와 평생의 인연을 맺게 해 준 것도 그 분이다. 학창시절 영자(英字)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선생님께 배운 영작문 덕분에 입사시험에서 최고 성적으로 합격할 수 있었고 조직 안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아 남들보다 한발 앞서 세계무대를 누빌 수 있었다.
맥 선생님이 떠나신지 어느듯 20년. 그분께 받은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다음세대에게 갚아야 할 빚이다. 무역협회를 은퇴하고 지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필자도 항상 그의 아낌없는 희생정신을 본받으려 노력하고 있다.
잊지 못할 진정한 나의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2023년 6월 김무한 씀

김무한(77.영문)
한국무역협회 전무이사
산학협동재단 사무총장
현)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