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우 한국호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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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9-06-05 00:36 조회 1,390회 댓글 0건본문

"나눔의 실천은 보람된 일, 기부 통해 즐거움과 건강도 얻죠"
영남대에 누적 62억원 기금 기탁, 24만 동문 최고액 기탁
평소 지하철 등 대중교통 이용, 근검절약 생활철학 귀감
69세 때 한자시험 1급 합격, 공부하며 노력․자기관리 철저
"80평생을 되돌아보니 주어진 여건 속에서 이 보다 더 이상 잘 살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이종우 ㈜한국호머 회장(64.기계)이 50억 상당의 부동산을 영남대학교에 발전기금으로 쾌척해 화제다. 기탁 부동산은 서울 온수공단에 위치한 한국호머 창업 공장부지의 일부로 이 회장의 땀과 혼이 담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이 회장은 이번에 기탁한 기금을 포함하면 총 62여억 원의 발전기금을 영남대에 기탁했다. 24만 동문 중 발전기금 최고액 기탁이다.
학교법인 영남학원 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이 회장은"영남대 과학도서관 리노베이션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리노베이션 비용 일부를 보태기로 마음을 먹었다"며,"후배들이 공부하면서 꿈과 희망을 품고, 나아가 사회 속에서 봉사정신을 갖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일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기탁의의라고 한다.
이 회장은 5월 24일 총동창회 사무실을 방문해 인터뷰를 가졌다.
이 회장은"발전기금 기탁식 이후 각종 언론매체를 본 지인으로부터'중대 결심에 찬사를 보낸다'는 전화와 메시지 500여통 이상을 받았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관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거액의 기금을 기부한 후 가족과 형제들 간에 반목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는 이 회장은"기부는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어렵다. 기탁을 하기까지 1년 이상 고민을 했고 큰마음을 먹고 기탁했다. 평소 기부 실천과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던 집사람한테'당신 정말 잘했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기탁식에서 장남 창익씨는 이 회장의 평소 근검절약과 생활철학을 이야기하며'앞으로 아버지와 같이 이런 의미 있는 기부활동을 하고 싶다'는 인사말로 1남 4녀 자녀들의 마음을 대변했는데, 이 회장은 아들의 말을 듣고 대견함과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기탁식에서 장학금을 받은 졸업생들이 장학기금 1천만원을 기탁해 깜짝 놀랐고 정말 기뻤다"는 이 회장은 장학생들과 편지, 전화 등으로 안부를 주고받으며"사회에 필요한 사람, 주어진 여건 하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라"며, 멘토 역할도 해준다.
이 회장은 지난 2002년부터 자신처럼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송암장학회'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약 12억원 상당의 장학기금을 영남대에 기탁했다.
매년 기계공학부 2학년에 진학하는 학생 3명을 선발해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급해 오고 있는데 졸업생 수가 17명이나 된다.
2016년에는 기금 11억원을 출연해 (재)송암이종우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기금 이자로 매년 대구․김천․군산․서울․인천 등의 고교생 16명을 선발해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이 회장은 겸손과 검소가 몸에 배여 있다. 발전기금 기탁식 당일에도 서울에서 KTX 일반실을 타고 대구에 왔다. 평소 근검절약이 몸에 밴 습관이자 이 회장의 삶의 모습이다.
택시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평소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등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바쁘고 급한 일이 없기에 조금 일찍 집을 나서면 된다. 택시비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습관 때문이다.
무임승차의 지하철 요금의 몇 배를 적립해 불우이웃돕기에 보태는 등 그동안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돕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아프리카 기아어린이돕기 등에 꾸준히 기부를 해왔다.
이 회장은 운전사도 파출부도 쓰지 않는다. 집안일은 부인인 신광순 여사의 몫이다. 그만큼 자신과 가족에게 쓰는 씀씀이는 엄격하다.
힘들고 가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평생 근검․절약으로 살아온 습관 때문에 쓸 돈은 충분하지만 생활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이 회장은 193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7살이 되던 해에 해방이 되어 경북 김천 구성면 골짜기에 정착했다. 75년에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오지였으며, 25여 가구의 집성촌 중 가장 가난했다고 한다.
김천에 정착한 후 군에 입대하기 전인 20살까지 어머니와 함께 농사일을 했다. 농사라야 천수답 세 마지기였다. 어머니가 3일 길쌈을 해주고 소를 빌려 천수답 쟁기질을 했던 기억, 380여개의 볏단을 지게로 지고 날으며 탈곡하던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어머니는 어렵게 살아도 남에게 절대 손을 벌리는 법이 없었다. 동네에서 가장 못사는 집이지만 어머니의 성품 때문에 절대 어머니를 무시하지 못했다"는 이 회장은"어머니의 정신과 생각 등 어머니의 영향력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한다.
이 회장은 일본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왔기에 한글을 몰랐다. 시골에서 책을 빌려 스스로 한글을 배우고 깨친 후 시골의 문맹자를 위해 밤에 호롱불 켜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회장은 대구 K2비행장에 근무하면서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27세의 늦은 나이로 영남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여 주경야독으로 공부했다.
"기초가 없어 대학에서 공부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공군 문관으로 근무하면서 함께 근무했던 장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공부를 했다"는 이 회장은"12시 전에 자 본적이 없이 죽자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69세 때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에 합격한 이 회장은 지금도 일본어와 중국어 등을 공부하는 등 남는 시간과 여유가 있으면 책을 본다고 한다.
이 회장은 서울 온수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을 2007년부터 6년간 활동했다."온수산업단지 뿐만 아니라 주위에는 명문대학 출신들이 많다"는 이 회장은"이들에게 당당하게 대구의 영남대 나왔다. 지방에서는 최고다. 내가 당신들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느냐"고 할 정도로 영남대를 졸업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대학을 다니지 않고 돈을 벌었으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족감을 느끼지 못 할 것"이라는 이 회장은"영남대를 졸업한 것이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이자 보람"이라고 강조한다.
"졸업 당시 만 30세 대기업 입사 연령 제한이 있어 대기업 원서를 못 낸 것이 한이 되었다"는 이 회장은"만약 기회가 주어져 대기업에 입사했더라면 부장과 이사까지 되었을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중소기업을 경영해 과연 사회에 기부를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회장은'신뢰'를 가장 중요시한다. 1977년 한국호머 창업 기금은 당시 퇴직금 150만원이 전부였지만 거래선으로부터'저 사람은 틀림없다'는 신뢰가 있었기에 돈과 물건을 빌릴 수 있었단다. 거짓 없이 신뢰받는 것은 무형의 자산이라고 자녀들과 직원들에게 특히 강조한단다.
이 회장은'凡戱無益 惟勤有功''春若不耕 秋無所望''大富有天 小富有勤'의 명심보감의 고사성어를 인용하며 가을의 결실을 위해 봄부터 부지런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수차 강조한다.
"그때 가난이 없었더라면 오늘이 있었겠는가? 가난한 이야기를 지금은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이 회장은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자수성가했다.
이 회장은 68년 대학 졸업 후 한일건재공업(주) 공장장과 영화철재공업(주) 전무이사를 거쳐 77년 서울 온수공단에서 ㈜한국호머를 창업했다.
경량철골 천장 및 칸막이 자재를 사용한 새로운 시공법으로 국회의사당, 63빌딩, LG트윈빌딩 등 대규모 빌딩 건축에 참여하여 국내 대형 건축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건실한 중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영남대에 대한 애정과 후배사랑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각별한 이 회장은 현재 학교법인 영남학원 이사, (재)영남대학교동창장학회 이사, KAIST 발전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3년 5월에 영남대에서 명예공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10년에는 영남대총동창회'자랑스러운 영대인 상'을 수상했다. 영남대는 2012년 중앙도서관 옆 잔디광장에 이 회장의 흉상을 제막했다.
이 회장은"기부를 통해 즐거움과 덤으로 건강도 얻고 있다. 나눔의 실천은 인생의 가장 보람된 일"이라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申在七편집국장, jclucky@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