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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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9-09-05 00:49 조회 1,220회 댓글 0건본문

"걷고, 웃고, 읽으며 남은 여생도 문학과 함께할 터'
첫 시집 출간 후 50년 만에 두 번째 시집'명당 죽집'펴내
뇌졸중․고관절 수술 초인적 의지 극복, 야간부만 12년 다녀
"내 신조는'걸어라․웃어라․읽어라'이다. 내가 걸어온 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걸어갈 길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 실천사항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내가 가는 길'이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김원중 포스텍 명예교수(58.국문, 문학박사)가 시집'명당 죽집'을 펴냈다. 지난 1969년 첫 시집'별'을 출간한 이후 50년 만에 발간한 두 번째 시집이다.
"팔순기념 시집을 발간하자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제자의 건의를 미루다가 제자의 채근에팔순을 넘기고 이번에 시집을 발간하게 되었다"는 김 교수는"이 시집을 계기로 괴테의"노년의 시는 인생이다"는 말처럼 나는 시를 쓴다기보다 인생을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2002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2007년에는 집 욕실에서 넘어져 고관절 수술을 받는 등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다. 두 번의 병마를 겪으며 병원 생활과 휠체어에 의지하며 투병생활을 했지만 초인 같은 의지로 건강을 회복했다. 하지만 지금도 왼손은 쓰지 못하고 걸음은 지팡이에 의지하여 어렵게 다닌다.
"2001년 포스텍에서 정년퇴임 후 대구세계문학제 발기위원장을 맡아 대구세계문학제를 추진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뛰어다니며 몸을 혹사했다. 문학제 무산과 함께 그 후유증으로 쓰러졌다"는 김 교수는"대구세계문학제가 성사되었다면 부산 국제영화제, 광주 비엔날레와 같이 대구를 알리는 세계문학제가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김 교수는 투병 중에도 휠체어를 타고 부산시민대학과 구미대학 평생교육원에 문학강의를 다닐 정도로 문학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병마 이후에도 에세이집'아버지가 주신 연필 두 자루'와'사람을 찾습니다''걷고, 웃고, 읽으며'등 세권의 에세이집과 평론집'영남의 인물 인문학사'를 펴냈다. 실로 초인적인 힘이자 불굴의 투혼을 지닌 의지의 한국인이다.
김 교수는 대구 반월당에 있는 한비문예창작대학과 영남이공대학 평생교육원에 10여 년째 문학강의를 해오고 있다. 요즈음도 시간만 나면 도서관과 박물관을 찾으며, 원고를 쓰고, 각 구청 노인대학 등에 인문학 강의를 다닌다. 이 모두가 건강을 위해서다.
김 교수는 1936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경북 안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가정이 되었다. 6.25 전쟁을 거쳐 대구로 와서 칠성시장과 교동시장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했다.
김 교수는 초등학교를 제외하고 중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야간부만 12년 다녔다. 가난 때문이었다.
김 교수의 꿈은 교수였다. 고교시절'사상계'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글을 쓰려면 교수가 되어야 하고, 교수는 학벌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야간부를 다니며 철저하게 살아왔다고 한다.
1968년 영남대 교수(15년)로 부임, 대구 한의대(5년), 포항공대(포스텍) 교수(14년)를 역임하고 2001년 정년퇴임했다.
중 3학년 때'학원'에 시가 입선되었고, 195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와 동화가 입선됐다. 당시 응모는 등단이 목적이 아니라 상금 때문이었기에 현상 모집이 있는 곳에는 모조리 투고했다고 한다.
고교시절에는 장윤익 동문(60.국문, 전)인천대 총장) 등과 함께'칡넝쿨'이라는 문학동인을 결성해 활동했다. 칡넝쿨은 당시 대구시내 고등학교 문학도들로 구성된 문학서클이였다. 지도선생은 박양균 시인이었다.
고교시절인 1957년 2인시집'별과 야학'을 발간해 출판기념회까지 열었다. 아마도 국내 최초 학생시집일 것이다. 그리고 63년 2인시집'과실 속의 아가씨'를 펴냈다. 그리고 1969년 첫 시집'별'을 펴냈다.
김 교수는 문학적 멘토이자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박양균 시인이라고 한다. 영남대 교수와 포항공대 교수로 갈 수 있었던 것도 박양균 시인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대구와 포항에 박양균 시인의 시비도 세웠다.
김 교수는 시인이지만 시 보다는 수필을 많이 썼다. 첫 수필집'하늘 만 평 사 뒀더니'이후 8권의 에세이집을 펴냈다. 수필집'하늘 만 평 사 뒀더니'는 문체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수필집 제목 자체가 전부 시적이다.
김 교수는 1968년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당시 서울대 출신이어야 교수로 임용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선근 총장을 찾아가고 이효상 이사장에게 편지를 쓰고 이사회를 연기하는 일련의 파란 속에 결국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서울대 출신의 교수 임용 관행을 바꾸고 영남대 출신이 모교 교수로 임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경북문인협회장, 문학세계 및 문예한국 주간 등을 거쳤다.
김 교수는 국문학과동창회장을 역임한 이상배 동문(58.국문.남헌서예원 원장)과는 각별한 사이로 이상배 동문의 여섯 자녀의 주례를 서는 진기록을 남겼다. 추후 국문과동창회 주최로 이상배 동문의 한시집과 김 교수의 시집(명당죽집) 발간 공동 출판기념회와 북콘서트도 열 계획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총동창회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장을 맡아 동창회 발전과 자문을 위한 역할도 맡고 있다.
김 교수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출신인 부인 이옥희 여사와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이옥희 여사는 매일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申在七 편집국장, jclucky@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