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칼럼 ] ‘달게 받아들임’, 무의미를 견디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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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3-02-05 00:18 조회 511회 댓글 0건본문

▲ 최재목(81.철학)
철학과 교수
철학 가운데 주로 동양철학이라는 장르를 30년 넘게 가르치며 살아왔다. 졸렬한, 어설픈 시간이었으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때론 칠흑 같은 밤에 언제나 여명이 오기를 기다리는 야간경비처럼, 때론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처럼, 길 위에서 머뭇거렸다. 우습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다. 이제 바깥으로 향하는 의지와 생각들을 버리고, 나 자신에 더욱 집중하기로 다짐한다. 입은 닫고, 자꾸 뒤로 물러서며, 내 삶의 소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쪽을 택해야만 한다. 버리고 줄일 목록 속에 당연히 내 인생도 포함된다.
책을 정리하다가, 고인이 된 이어령의 『생명이 자본이다』을 다시 펼쳐 보았다. 이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프롤로그> 부분(8쪽)의 “적극적 혹은 전략적으로 받아들이는” 뜻의 ‘감수(甘受)’라는 말이 왠지 눈에 들어왔다. 감수란 “쓴 것을 달게 받아들임”인데,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나의 『대전환』 끝부분에 나오는 키워드 ‘레지그네이션(Resignation)’을 번역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체념’으로 번역하나 이어령은 ‘감수’로 번역하는 쪽을 택했다.
괴롭거나 힘든 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감수’의 정신은 언젠가는 ‘해명될’ 혹은 ‘만날’ 무언가를 기다리는 태도이다. 어떤 사람은 현재적 지속의 연장선에서 우연히 몽상해보는 ‘기대’로서, 어떤 사람은 현재 그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무언가의 필연적 도래를 믿는 ‘희망’으로서 기다릴 것이다. 전자는 주어진 인간적 기준 아래 ‘현재’에 부단한 노력을 쏟게 되고, 후자는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 의미 부여를 통해 ‘미래’에 깊은 신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어긋날 수 있고, 믿음은 깨질 수 있다.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얼마나 예쁘게 태어날지는 사실 때가 돼 봐야 안다. 56억 7천만 년 뒤에 온다는 메시아로서의 미륵은 - 내가 그때까지 살 수도 없기에 - 오로지 그저 굳게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달게 받아들이는 ‘감수’의 의미란 무엇일까? 나는 기대 속에서 살았는가, 희망 속에서 살았는가? 어느 쪽도 아니고 그저 대책도 없이, 감수했다고 본다.
그때, 그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그 무엇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큼의 시간적 경과, 공간적 변화를 감수해야만 한다. 공짜란 없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처럼, ‘한참 시간이 지나고, 위치가 달라진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을 알기 위해 나는 허송세월을 감수한 것인가? 아니다. 그냥 뭣도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기대도, 희망도 없이 사는 연습, 솔직히 ‘무의미를 견디는 연습’을 해 온 것이다. 그래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무엇이든 하면 된다!’ ‘그런 자유를 스스로 실천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의미를 얻기까지 나는 기대도 희망도 없이, 그냥 스스로의 평범한 삶의 미덕에 충실했다.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