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처 정담한담] 사람의 이중성, 그리고 역사의 양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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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2-07-05 00:51 조회 694회 댓글 0건본문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祖)는 세종(世宗)과 함께 대표적인 개혁군주로 손꼽힌다.
100년 넘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을 목격한데다 그 여진(餘震)이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살얼음판 같은 세손(世孫)시절을 거쳐 극적으로 보좌에 오른 왕으로, 재위시절의 굵직한 업적들 외에도 갑작스런 죽음과 독살설(毒殺說)까지 수많은 역사의 기록과 뒷이야기를 논문과 교과서는 물론이고 소설과 영화,드라마에 남기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속의 정조는 항상 ‘잘생긴’ 당대 최고의 배우가 맡았고 늘 백성을 생각하면서 과감한 개혁정치를 펼치는 성군(聖君)으로 묘사돼 왔는데 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史料)들을 살펴봐도 문(文)과 무(武)에 모두 정통한 뛰어난 임금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10여 년 전,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환지(沈煥之)의 후손 집에서 3백 통 가까운 편지 뭉치가 발견되면서 작은 반전(反轉)이 일어난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이 편지들은 “읽고나서 태워 없애라”고 당부할 만큼 은밀한 내용인데 아이러니하게도 200년 넘게 고이 보존돼 오다가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심환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옹호한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領袖)로, 정조의 친위세력이던 시파(時派)의 거두 채제공(蔡濟恭)과 대립했던 인물이며 훗날 정조의 독살을 사주(使嗾)했다는 의심까지 받은 노회한 정치꾼으로 각인돼 있다.
그런데 편지에는 정조가 자신의 정적(政敵)이나 다름없는 심환지와 극비리에 국정현안을 논의하고 심지어 두 사람이 세밀하게 각본을 짜서 조정대신들 앞에서 정치연극을 벌인 사실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에 요즈음 말로 ‘후레자식’ 같은 욕설을 섞어가며 신하들의 ‘뒷담화’를 하는 대목도 자주 등장해 드라마 속의 멋있고 지적인 정조와는 다른 일면 드러나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공작정치의 귀재’라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듯 한데 채제공이 다시 살아나 이 편지들을 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또 다른 반전의 에피소드도 있다.
조선 최고의 명필(名筆)이자 당대의 석학으로 꼽히는 추사(秋史) 김정희는 제주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통해 자신의 송백(松柏) 같은 절개와 선비의 고고(孤高)한 품격을 보여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남을 평가하는데는 겸손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오만방자했던 일화가 적지않게 전해 온다.
추사에 버금가는 명필 소리를 들었던 원교(圓嶠) 이광사를 향해 “붓 잡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는 혹평과 함께 ‘썩은 쥐’라는 모욕적인 비유를 서슴지 않았고 제주도 유배(流配)길에 잠깐 머물렀던 해남 대흥사에서는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의 글씨로 갈아치운 일도 있다.
이광사 뿐만 아니라 우봉(又峰) 조희룡, 창암(蒼巖) 이삼만 등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손꼽히는 서화(書畵)의 대가(大家)들도 추사의 이른바 ‘모두까기’ 독설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정조나 추사나 위에 언급된 ‘반전의 사건’들만 놓고 보면 하루아침에 위선자, 또는 교만하기 짝이없는 인물로 매도(罵倒)될 수도 있지만 허물 보다는 업적이 훨씬 크기에 여전히 존경받는 우리의 선조(先祖)로 기억되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상반된 시각과 다양한 분석은 학계의 일상적 과제지만 20세기 우리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은 이념과 정치가 개입하면서 혼란과 혼선의 연속선상이다.
진영에 따라 어느 한 부분을 근거로 전체를 부정(否定)하는 의도적 확증편향(確證偏向)이 존재하는 한 실체적 진실과 객관적 역사는 설 땅을 잃게 된다.
대한민국과 함께 75년을 달려온 우리 모교의 설립과정과 정체성을 규정(規定) 하는데 있어서도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사무총장 이형관(77.영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