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칼럼] 영남과 영남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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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5-09-26 09:14 조회 86회 댓글 0건본문
홍형식(80.사회) · 한길리서치 대표
영남이라 하면 지리적으로 한양길 고개 기준으로 조령, 산맥으로는 소백산맥이남 지역이다. 그러나 영남은 조선시대 행정 명칭은 아니다. 영남의 행정명칭은 지역을 대표하는 두 도시 경주와 상주의 앞 두 글자를 딴 경상도다.
조선시대 경상도는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지만 군영체계로서 좌도와 우도로 나누었는데 그 기준이 낙동강이다. 도성인 한양에서 봤을 때 낙동강 왼쪽(영주 안동 대구 경주 등)이 좌측이어서 경상좌도, 오른쪽(상주 성주 합천, 합천, 밀양, 진주 등)이 경상우도다. 즉 영남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낙동강이 경상 좌도와 우도로 나눈 지리적 경계로 신라와 가야라는 고대국가의 역사⋅인문지리적 정체성을 이어오고 있다.
통일신라시대까지 한반도 주류였던 영남은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영남의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지면서 정치의 중심에 다시 서게 된다. 그 과정은 먼저 조선 건국 초기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정치상황이다. 건국 초기 왕들은 왕권 강화를 원한 반면, 건국 공신들은 ‘조선은 신하의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군신관계를 수평적 동업자로 신하의 역할이 큰 3정승의 의정부 중심 정승정치를 원한 공신 훈구파들과 의정부 정승을 건너뛰고 왕명이 판서(장관)를 통해 바로 하달되는 육조직계제의 상하 군신관계를 원한 왕들간의 대립이다. 이렇게 건국 초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들에게 영호남지방에서 도학 정치를 내세우는 개혁파 비기득권 사림파는 기득권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연대 세력이 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영남 사림파의 왕권 우위 노선이다. 구미 금오산에 자리를 잡아 김숙자-김종직 부자등 사림파를 길러낸 길재는 역성혁명에 비판적이었다. 자연 길재의 학풍을 이어 받은 영남 사림파는 왕권을 신권 위에 두고, 왕도정치를 주장했다. 비록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었지만 ‘충신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에 해당되지 않는 이후 세대에게 조선의 왕은 충성의 대상인 임금이었다. 따라서 왕도정치를 주장하는 사림파는 조선의 임금에게 충성을 하는 것은 당연하였으며, 고려의 왕을 바꾸는 것에 비판적이 듯이 조선의 왕을 바꾸려는 역모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사림의 종주 김종직을 중심으로 성장한 사림정치는 4대사화로 많은 희생을 냈지만, 문정왕후의 명종 이후 선조 대에는 훈구세력을 누르고 사림파 우위의 정치세력이 된다. 또한 영남사림파들은 東人이라는 당파를 중심으로 훈구세력을 포용하려는 西人에 비해 더 선명한 개혁성으로 정국 주도 세력이 되었고, 그 중심에는 퇴계학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남 사림파들의 중앙정치에서 주도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선조때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로 호남 사림파가 몰락하고, 이후 세자건저의 사건의 정철 처리 문제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된다. 이후 임란전후 처리 과정에서 영남 경상좌도 이황계 남인의 전성기는 끝나고, 임란 의병중심이었던 경상우도 조식계 북인들이 광해군 대에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중심세력 북인이 무너져 남인에 흡수되고, 반정에 협조했던 남인들은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 중심은 영남에서 근기지방이 되었으며, 이들 조차 숙종대 환국정치에서 패한 이후, 소론과 함께 장희빈의 경종 편에 서지만, 경종이 죽고 서인 중심의 영조 대에 이르러 사실상 정치적 맥이 끊겼다. 여기에 더해 영남 사림파들은 경종에 대한 충심(?)으로 소론이 주도한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고, 끝까지 버티다 영조의 대노를 쌌다. 그 결과 대구감영앞에 平영남비가 세워져 선조때 정여립의 난으로 호남이 반역향이 된 이후 영남 또한 반역향의 처지가 되었다. 충절의 본산이며 왕권중심⋅왕도정치를 내세운 영남정치의 말로가 아이러니 하다. 이후 조선은 멸망까지 서인 중에서도 노론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영조 평영남비 이후 이런 영남정치의 몰락을 빗대 200년간 당상관을 배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러나 영남정치는 주도권을 상실했음에도 정치의식은 왕권 우위 우국충절이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은 영의정으로 난을 총책임 졌고, 김성일은 일선에서 민심을 다잡고 의병과 관군을 지원하는 초유사 역할을 다하다 전쟁 중에 사망한다. 북인은 정인홍, 곽재우 등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다. 또한 영남은 일본 강점기에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625전쟁에서 낙동강, 포항 기계 안강 마지노선을 구축하고 학도병까지 나서 국가를 지켰다.
이러한 인문지리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영남 그 중에서도 대구경북 지역의 독특한 정치적 의식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왕권을 중시하는 정치의식은 오늘날 민주공화정이 된 대한민국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왕에 해당하는 대통령을 바꾸는 탄핵에 대해 무의식으로 비판적이다. 이는 박근혜⋅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대한 비판적인 정서가 단순히 보수 우리편 대통령이전에 왕권을 신권에 우선하는 잠재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근현대사에서 일본 침탈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공산주의 침략을 마지막으로 지켜내면서 민족주의적 반공의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자연 영남은 보수의 본산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이러한 영남의 정체성은 민족과 국가를 중심에 놓는 국가주도 조국 근대화 전략 즉 국가주의적 의식으로도 나타난다. 물론 그 중심은 박정희 전대통령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남 특히 대구경북의 정체성과 정치의식은 근대화와 민주화 이후 불편한 비판을 마주하게 된다. 왕이 다스리던 전제군주제의 왕권중심 의식은 민주공화정이 된 대한민국에서 反민주으로 비춰질 수 있고, 625의 역사적 역할은 냉전이후 탈이념 분위기에서 중도와 진보에게는 수구적으로 비쳐진다. 그리고 실제 현재 영남정치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 모아지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 전대통령을 중심에 두는 영남대학교는 이러한 영남의 정체성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홍형식(고려대 사회학석사, 영남대 사회학 박사과정수료) 동문은 현재 한길리서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이전에는 대원고⋅대명중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